이발하던 날

전광투데이 승인 2023.03.19 17:31 의견 0


어젯밤 찾아온 추위가 건너편 집 지붕 위를 도화지 삼아 하얀 그림을 마음껏 그리며 뛰놀다 천천히 동녘이 밝아오며 해님이 고개를 내밀자,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그대로 도망갔는지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자 여기저기 하얗게 피어난 서리꽃들이 밝은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발(理髮)을 하려고 단골 이발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서 오시게!”하며 주인께서 반갑게 맞이하였다. “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세요. 또 사업도 대박 나시고요.” “고맙네! 동생께서도 금년 한 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소. 사람이 머니머니 해도 건강 가치 중요한 거시 읍드란 마시”하더니 “그란디 이발하시꺼이제?”묻는다.
“사람이 이발소에 왔으면 당연히 이발을 해야지 무엇을 하러 여기를 왔겠습니까?”하며 상의를 벗고 의자에 앉으니 물뿌리개로 머리에 물을 뿌리더니 “동생! 이번에는 어째 머리가 마니 질어부럿네! 요즘 무슨 바쁜 일이 있어 이발을 못했든가?” “그게 아니고 설날 이삼일 전에 이발을 하려고 여기 왔는데 아무도 안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주인 호출용 벨을 눌렀는데 다른 때 같으면 한번만 눌러도 형님께서 이층에서 바로 내려오시는데 그날은 세 번을 눌러도 소식이 없고 또 이층인지 삼층인지 모르겠으나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올라가 볼까? 하다가 또 실례가 될지 몰라서‘내일 다시 와야겠다.’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어쩌다보니 그런지가 벌써 열흘이 넘어버렸네요.”
“그랬어? 으째 내가 이발소를 비웠으까?” “글쎄요! 제가 어찌 그 사정을 알겠습니까? 그런데 여자 목소리가 많이 들리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면 아마 우리 처갓집에서 손님들이 온 날 자네가 왔든 모양이시! 그란디 해마다 겪는 일이기는 한디 명절 때 그랑께 설이나 추석이 가까워지문 대목을 타느라 그란가 으짠가 이상하게 손님이 읍드란마시,
그래갖고 몇날 며칠을 말 그대로 포리만 날리다 한 이삼일 냉겨노코 손님들이 오기 시작한디 금년에는 유난히 더 읍드라마시 그래갖고 한 며칠 계속 놀았는디 자네가 이발하러 온 날은 우리 처갓집이서 처남하고 처남떡, 그라고 조카들이 왔드란마시, 그래서 평소에는 술이 한잔 생각나도 이발할 손님들이 오면 술 마시고 이발을 해줄 수는 읍응께 맘대로 술도 못 마신디 그날은 손님도 읍고 그랑께 오랜만에 한 잔하고 놀아 부렇는디 그날 하필이문 자네 씨가 왔든 갑구만.”
“그러면 옛날에도 그렇게 명절 때면 손님이 없었나요?” “아니제! 옛날에 보성군민이 13만이라고 했거든 그란디 지금은 4만도 안된다고 그라든가? 그랑께 옛날에는 명절이 다가오문 한 보름 전부터 준비를 해서 머리를 자르는 사람, 면도하는 사람, 또 머리를 감기는 사람, 마지막으로 마무리하는 사람, 서로 역할을 분담해서 계속 돌아도 보통 새벽 2시에서 3시가 넘도록 이발을 하고 그랬거든,
또 그때는 사람들 먹고 살기가 힘든 때여서 머리가 웬만큼 질어도 ‘쪼금 더 있다 명절에 한다!’고 안하고 있다 딱 닥치면 그때 한꺼번에 몰려드니 누구말대로‘이발 한 번하는데 2년이 걸린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손님들이 째깐식 줄기 시작하드니 물론 평소에 단정하게 하고 다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옛날처럼 명절이라고 해서 특별히 손님이 더 많거나 하지는 않고 오히려 더 업는 것 같거든, 그러다보니 옛날에는 일 끝내고 직원들하고 서로‘고생했다!’며 막걸리도 한잔씩 나누는 재미도 쏠쏠했는디 지금은 나 혼자 모든 일을 한께 그런 소소한 재미도 읍드란 마시 그라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또 읍것제 잉!”/류상진 전보성우체국 집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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