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게 살며시 겨울을 만나고 온 차가운 바람이 무슨 명령을 들었는지 숲속에 나무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사정없이 흔들어 대자 이별 연습도 못한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더니, 흩어지고, 구르고, 흩날리며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 나뭇잎들도 지난여름 푸른 젊음을 자랑했을 것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우리 곁을 떠나며 또 한 번의 가을과 작별해야 하겠구나!’ 생각하니 세월이 정말 빠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늘은 지난번 구입한 바지 길이를 줄이려고 친구가 운영하는 세탁소로 향하였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다리미로 바지를 다리던 친구가 반색하며 “어서 와! 자네 정말 오랜만일세! 그동안 잘 지내셨는가?”하며 반겨주었다. “나는 잘 있는 편인데 자네는 어떤가? 몸 어디 아픈 데는 없는가?”
“나는 다행히 아직 아픈 데는 없는데 저기 노동면(蘆洞面)에서 살고 있는 우리 중학 동창 기출이라고 있지 않은가? 그 친구가 보름 전에 죽었다고 하더라고.” “그랬어? 아이고~ 안타깝네! 그러면 무슨 병으로 죽었다던가?” “그 친구는 어릴 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바람에 어린 동생들과 함께 서럽게 컸거든, 그런데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그렇게 가 버리더라고, 그런데 자네는 요즘 운동은 꾸준히 하고 있는가?”
“꾸준히 까지는 아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산에 좀 다니고 있어.” “그래! 그런데 자네 얼굴은 많이 좋아졌네!” “그런가? 요즘 밤이면 심심하다고 간식을 며칠 먹었더니 그게 모두 살로 갔는지 금방 몸무게가 늘어나더라고. 그런데 자네 자전거는 매일 타고 다니는가?” “요즘 시간이 없어 못 타고 있어.” “바쁘다면 세탁소 말고 또 무슨 다른 일을 하고 있는가?”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시골에 농사가 조금 있지 않은가? 그런데 얼마 되지 않은 농사라도 할 일은 뭐가 그리 많은지 우리 집사람이 매일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게 한정이 없더라고 특히 올해는 예년에는 보이지도 않던 벼멸구까지 극성을 부려 정말 정신이 없더라고.” “그러면 벼멸구 피해는 얼마나 보았는가?” “그런데 나는 다행히 모를 빨리 심는 바람에 큰 피해는 보지 않고 넘어가기는 했지만 큰 피해가 아니라도 조그만 피해조차도 없겠는가?” “그러면 왜 모를 빨리 심었는데?”
“올해 농협에서 공급하는 모를 심으려고 우리 마을 이장(里長)에게 부탁했는데 우연히 농협에 가서 모 공급 받는 사람 명단을 보니 내 이름은 안 보여!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이장에게 물었더니 ‘깜박 잊어버리고 신청을 못 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대로 금년 농사 망치고 말 것이냐?’ 했더니 ‘형님 논에 모는 내가 다 알아서 심도록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씨요!’ 하더라고 그러더니 농협에서 모를 공급하기 전 다른 사람이 못자리에서 키운 모를 조금 일찍 심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벼멸구가 우리 논에 와서 먹기는 먹었는데 벼가 거의 다 익어가는 중이어서 그런지 그렇게 큰 피해는 없는 것 같더라고.” “익은 벼에는 그렇게 피해가 없었다면 이제 익어가는 벼는 피해가 많았을까?” 0000)“벼멸구가 벼잎에 붙으면 즙을 빨아 먹거든 그런데 우리 벼는 거의 익은 상태기 때문에 즙이 나오면 얼마나 나오겠는가?
그러니 벼멸구들도 맛이 없으니 조금 먹다 말았겠지만 이제 익으려고 하는 벼 줄기는 얼마나 맛있겠는가? 그러니 집중적으로 달려들어 빨아먹기 시작하면 볏짚까지도 쓸 수 없을 정도로 그 논은 금방 초토화되어 버리거든, 그래도 다행인 것은 피해 본 농가에는 보험(保險)에서 일부 그리고 군(郡)에서 일부 지원을 해 준다니 그걸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아.”/류상진 전 보성우체국 집배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