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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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3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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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주산에서 운동을 마치고 내려와 보성읍 구교마을 쪽 농로 길을 걸어가는데 밭에 잎은 바짝 말라버렸지만 통통한 줄기 몇 개가 강하게 불어대는 바람을 이겨내며 씩씩하게 서 있는 것을 보고 선배께서 “아니 저 아까운 피마자를 왜 수확하지 않고 저렇게 썩도록 내버려 뒀을까?” 하며 안타까운 표정이다.
“그런데 저게 잎도 다 썩어 버린 데다 가운데 줄기만 남아있는데 어떻게 피마자인 줄은 아셨어요?” “열매를 보면 모르겠는가? 이미 시커멓게 변했지만 가운데 몇 개가 뭉쳐서 달려있는 모양을 보면 영낙 없이 피마자 아닌가?” “그런데 저게 어떻길래 그렇게 아까워하세요?”
“자네는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저건 버릴 게 하나도 없는 아주 귀중한 식물이야.” “그래요? 저게 그렇게 버릴 게 없다는 이야기는 형님에게 처음 듣는 것 같네요.” “그런가? 피마자는 아주까리라고도 부르는데 열매는 잘 말려 기름을 짜는데, 그 기름은 동백기름과 같이 여인(女人)들의 머리에 바르기도 하고 화상(火傷) 치료에 쓰이기도 했거든,
또 참기름이 없으면 피마자유를 음식에 넣어 먹기도 할 정도로 여러 가지 쓰임새가 많았어, 그리고 잎은 잘 말린 다음 겨울에 특히 정월대보름에 찰밥을 싸 먹으면 아주 맛이 있었고, 어디 그뿐인가? 줄기는 잘 걷어 말린 다음 겨울에 아궁이에 군불을 때면 아주 방도 따뜻하고 좋았어! 또 뿌리는 잘 말려두었다가 한약(漢藥) 재료로 사용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니 저렇게 아주까리가 홀대받는 세상이 되어버렸네.” 하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후배가 “형님 말씀을 들어보니 아주까리가 아주 좋은 식품 겸 한약재인 것 같은데 저는 아직 한 번도 잎은 먹어본 적 없는데 형님은 드셔보셨어요?”
“옛날 내가 젊었을 때 우리 어머니가 저걸 말려두었다가 겨울에 물에 불린 다음 꼭 짜내 갖은양념으로 무친 다음 ‘먹어보라!’ 주셨는데 그걸 밥에 싸 먹으면 정말 기가 막힌 맛이었거든.” “그러셨어요? 저는 지난 대보름날 저의 어머니께서 가져다주신 토란잎으로 찰밥을 싸 먹으니 아주 맛있고 좋더라고요.”
“그러면 토란잎은 동생 어머니께서 말리셨을까?” “물론 그러셨겠지요. 그리고 옛날부터 저의 어머니는 가을이 시작되면 토란잎은 물론이고 시래기, 또 풋 호박을 잘라 말리기도 하고 늙은 호박을 가늘게 썰어 말리기도 하셨는데 고사리 나올 때가 되면 비료 포대를 가져가 한 포대씩 꺾어 오시더라고요.” “그러면 동생은 한 번이라도 고사리 꺾으러 가 본 일은 있는가?”
“저도 어린 시절 어머니 따라 몇 번 다녀온 적 있는데 그때 산에 가 보면 아주 통통하고 보기 좋은 고사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키가 큰 것, 작은 것, 또 통통한 것 날씬한 것 여러 가지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어쩌다 아주 통통하고 좋아 보이는 고사리가 하필 가시덤불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으면 아무리 가시가 찔러도 기어이 꺾어내거든요.”
“그렇지 고사리 꺾으러 간 사람이 그게 무섭다고 못 꺾으면 되겠는가? 그래서 누가‘고사리 한 주먹만 주씨요!’ 한다면 그걸 꺾었던 공력을 생각하면 절대 못 주는데 나중에 나물로 만들면 이 사람도 한 접시 저 사람도 한 접시 나눠주거든,” “그런데 어디 고사리만 나누겠어요? 다른 나물도 다 나누어 먹는 것이 우리네 풍습인데 어쩌겠어요?”
“그런데 가을이 되어도 한가지 말리지 못하는 것이 있더라고.” “그게 무엇인데요?” “호박잎은 말리지 못하더라고.” “그건 왜 그럴까요?” “아마 그게 잘 부스러지니까 그런 것 같거든. 그런데 요즘은 그걸 따서 냉장고에 저장해 놓고 먹으니 옛날처럼 그렇게 죽기 살기로 말릴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어.”/류상진 전 보성우체국집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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