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벌린 채 시선을 아래에 두고 있다. 인체의 장기를 옆에서 본 듯한데, 그 모양이 오늘날 해부도와는 조금 다르다.
구암 허준(1539∼1615)이 1610년 완성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첫 장이다.
조선과 중국에서 유통되던 의학서를 집대성해 질병 이론과 처방을 정리한 의학책은 우리 한의학은 물론, 동양 의학의 필독서로 꼽힌다.
소설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책이다.
지난해 한국 작가이자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대표작인 이 책은 20여 개 언어로 번역돼 세계 각국의 노벨위원회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우리 역사와 문화가 담긴 고문헌부터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의 애독서까지 한국인의 책장을 채운 책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국립중앙도서관이 개관 80주년을 맞아 15일부터 본관 1층 전시실에서 선보이는 '나의 꿈, 우리의 기록, 한국인의 책장' 특별전을 통해서다.
전시는 도서관이 그동안 수집·보존해 온 국보, 보물, 초판본 등 200여 종을 정리했다.
도서관 관계자는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책이 백성을 위하는 위민(爲民), 책과 함께하는 여민(與民), 스스로 기록하고 표현하는 시민(市民)으로 성장하는 서사를 담은 전시"라고 소개했다.
도서관을 대표하는 '명품' 장서들은 이번 전시를 위해 오랜만에 외출한다.
개막일인 15일에는 '동의보감' 원본이 2009년 이후 약 16년 만에 관람객 앞에 서며, 보물 '석보상절'과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 원본도 최초로 전시된다.
평소 수장고에서 고이 보관하는 책을 하루 특별 공개하는 것이다.
유물 안전을 위해 남은 기간에는 영인본(影印本·원본을 사진이나 기타 방법으로 복제한 인쇄물)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왕조시대', '근대 전환기', '새나라, 새출발',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와 세계화' 등 시대 변화에 따라 주목받은 책들의 면면은 눈여겨볼 만하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 여성학자 빙허각(憑虛閣) 이씨가 한글로 쓴 '규합총서'(閨閤叢書)는 당대 여성의 가정생활과 국어 표현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1886년 창간한 주간 신문 '한성주보'(漢城周報), 한국 최초의 근대 종합 잡지인 '소년'의 창간호, 백범 김구(1876∼1949)의 자서전 등도 시대상을 담고 있다.
전시에서는 역사의 한 장면을 기록한 책도 소개한다.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 주도로 엮은 작문집 '내가 겪은 이번 전쟁'은 어린이의 눈으로 한국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갑자기 부르릉 부르릉 비행기 소리가 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방에서 뻘건 불이 나서, 동네가 불바다가 되었읍니다."(전주 풍남국민학교 2학년 이수남 작)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청년 노동자 전태일(1948∼1970)의 짧고 치열했던 생애를 기록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 5·18 광주 민주항쟁을 생생하게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도 책장을 채운다.
책 표지만 보기 아쉽다면 도서관이 추천하는 노래를 함께 듣는 것도 좋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다룬 부분에서는 조용필의 '단발머리',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들국화의 '행진' 등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가요 악보를 소개한다.
2015년 방송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등장하는 '성보라'(류혜영 분)의 책장을 참고해 1980∼1990년대 대학생들이 즐겨 읽었던 책으로 채운 책장도 시선을 끈다.
전시장 밖 1층 로비에 마련된 'T1의 책장'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e스포츠팀 T1 소속 게이머 '페이커' 이상혁, '오너' 문현준, '구마유시' 이민형 등이 추천하는 책과 T1 굿즈(goods·물건)를 한자리에 모았다.
'페이커'는 2022년 출간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다산초당)를 추천하며 "삶이 무겁게 느껴질 때 내려놓는 방법을 지혜롭게 배울 수 있었다"고 전했다.
전시는 올해 12월 14일까지 볼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향후 목표를 '미래를 여는 지식의 길'로 세우고 인공지능(AI) 기반 미래 도서관 체계 구축, '국가문헌보존관' 건립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6월 기준으로 도서관이 소장한 자료는 1천487만2천282건이다.
국보, 보물을 비롯한 귀중 자료와 고문헌, 도서, 비도서를 모두 포함한 것으로 온라인 자료까지 모두 포함하면 소장 자료는 약 3천500만 건에 달한다.
작년 한 해 도서관을 다녀간 방문자는 129만4천421명이다.